드라마 ‘루시퍼(Lucifer)'(2)넷플릭스

평소 미드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우연히 만난 넷플릭스 드라마 ‘루시퍼’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영화 소개를 보다가 우연히 시즌1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즌2, 3, 4, 5를 쫓게 됐다(시즌6은 못 봤다). 그리고 드라마를 본 지 한참 지난 지금도 가끔 그 드라마가 떠오른다. 책도 그렇다. 인상적이었던 책은 그 후의 삶에서도 가끔 생각난다.

미국 내 기독교 단체에서는 악마인 루시퍼를 지나치게 매력적으로 그려 사람들에게 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으며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한 사람으로서 그런 비판도 이해하지만 현재는 무신론자인 만큼 하나의 작품으로 본다. 나는 왜 이렇게 이 드라마가 기억에 남았던 것일까.

사랑의 정의

선뜻 보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내용은 상당히 철학적이다. 그래서 흥미로웠겠지만. 그중 하나는 사랑에 대한 개념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인물은 루시퍼와 클로이 형사의 관계다.

왜 다른 사람들은 악마인 루시퍼 앞에만 서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입에 올리는 것일까. 왜 클로이에겐 그런 악마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걸까. 그 이유를 시즌5에서 루시퍼의 형이자 천사인 아메나디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남녀 모두 루시퍼에게 끌린 것은 인간의 욕망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고, 인간이 루시퍼에게 끌리는 이유는 루시퍼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사람들은 루시퍼를 통해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숨어있는 자신의 욕망을 보면 그에게 빠져버린다. 그러나 클로이는 다르다. 클로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루시퍼를 통해 자기 자신(자신의 욕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루시퍼의 존재 자체를 본다.넥플릭스 드라마 <루시퍼> 중

넥플릭스의 드라마 루 시퍼 속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사랑의 정의도 그렇다. 나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 그래서 굳이 그 사람 앞에서 착한 척, 착한 척, 똑똑한 척 할 필요가 없다. 단점도 장점도 장점이 아니고 단점이 아니라 그 사람 그 자체다. 그런 사람일 때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를 이 드라마를 통해서 만난것이 나에게 더 인상적이었던것 같다.

인간적인 모습

무엇이 인간적인가, 라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뇌하고 분노하고 고독하기도 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에 대한 정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지상의 인간들은 물론 루시퍼와 같은 천상계의 존재들로부터도 인간적인 감정을 보여준다.

#1. 공허함, 그 하나는 공허함, 무력감이다. 살면서 한 번은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나도 그렇다. 한 가닥을 파고들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그것이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동안의 내 노력이 모두 허망해지고 무의미해져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으로 허탈함을 느낄 때도 있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한 번쯤 느낄 수밖에 없는 이 허무함이 이 드라마에서도 나온다.

형사 클로이는 자신이 루시퍼를 위해 만든 존재라는 사실에 허탈함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라고 믿고 살아온 그녀인 만큼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 무서울 정도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넥플릭스 드라마 ‘루시퍼’ 중

<루시퍼> 속 공허함, 무력함을 루시퍼도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 루시퍼가 그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 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반항을 거듭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신의 계획, 아버지의 손아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수록 그는 더 괴로워한다. 우주적 무력함이라고 표현한다. 자유로움이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게 거창해 보이지만 거창하지는 않다. 실제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누군가의 도구가 되어 조종당하고 통제되는 삶이 내 삶인지, 내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 질문을 던져 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클로이, 루시퍼도 그렇고,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고 무력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넥플릭스 드라마 ‘루시퍼’ 중

넥플릭스 드라마 ‘루시퍼’ 중

넥플릭스 드라마 ‘루시퍼’ 중

#2. 외로움도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혼자 외로움을 즐기지 못하면 삶의 주체성을 잃을 수도 있다. 혼자 있을 수 없는 인간은 둘 있어도 외로울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삶 전체에서 외롭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

메지킨은 루시퍼와 함께 천상계에 들어온 악마 중 한 명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잘 헷갈린 것은 그녀가 루시퍼를 좋아하는 것일까,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존재로서 좋아하는 것일까, 잘 알 수 없었다. 자칫하면 등장인물 중 감정변화가 가장 큰 인물이 메지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분노도 질투도 외로움도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녀의 이런 다양한 감정 및 과격한 감정들이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즌 5에서 그녀가 정신과 상담가인 린다와 상담하는 장면에서 이해가 갔다. 어렸을 때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도 그렇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아픈 기억이 그녀에게는 많다.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사람과 (그녀는 악마이기 때문에 다른 존재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과정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 그럴 수밖에. 그에게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이 트라우마를 덮을 만큼 안정된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넥플릭스의 드라마 루 시퍼에서 그는 외로움을 외로움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왜곡된 행동과 말로 표현한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처받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행동하지만, 감정은 못 속여.

넥플릭스의 드라마 루시퍼에서 그녀는 결국 울부짖고 만다. 왜 나를 떠났냐고.

넥플릭스 드라마 ‘루시퍼’ 중 #하느님의 모습

시즌1부터 가장 기대했던 것은 하나님(루시퍼의 아버지)은 드라마에 나오느냐였다. 만약 신의 존재를 드라마에 담아낸다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더 궁금했다.

넥플릭스 드라마 루 시퍼의 중신이 어떤 모습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인간 안에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드라마 속 장면은 하나님 유일신이라는 느낌보다는 아들들을 만나러 온 아버지의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기대를 저버린 것은 신은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루시퍼도 충격을 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납득이 간다.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이자 루시퍼의 아버지지만 루시퍼를 자기 뜻대로 살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루시퍼는 오랫동안 모든 삶이 아버지의 계획 속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인형처럼 조종되고 있다고 믿었고 이에 분노했다.

넥플릭스의 드라마 루시퍼에서 사실 우리 인간도 그렇다. 부모는 열 달 동안 뱃속에서 아이를 안고 앉지 못하는 아이에게 먹이고 재우고 키우고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키우지만 그 아이는 부모의 종속물이 아니다. 어린이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다. 부모라고 자녀의 삶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된다.

루시퍼의 아버지인 신이 지상계로 내려와 루시퍼에게 접근한 것은 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상담가이자 맏며느리인 린다에게 상담을 받기도 한다. 천지만물의 창조자인 신도들의 자녀를 키우기란 쉽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이 드라마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드라마를 본 지 꽤 된 시점이라 정확하고 세부적인 줄거리는 잊고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이자 관점에 불과하다. 이런 시선으로 이 드라마를 보았고, 그래서 이 드라마가 나에겐 특별하고 재미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다. 그림이든 책이든 영화든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난 뒤에는 보는 사람의 경험과 시선으로 재창조되는 것이 허용되는 점은 모든 예술의 공통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인간에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본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맨 존재의 의미를 아는 것,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내 감정을 스스로 알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이 드라마에서는 정신과 카운슬러 린다의 역할이 크다. 그녀 앞에서 사람들뿐 아니라 악마 루시퍼와 천사인 오빠는 물론 신의 신과 신의 아내 등 천상계, 지상계를 막론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상담이라는 공간이 없어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면 좋겠지만 그만큼 어른이 될수록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알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쉽게 쓰여진 한 권의 철학책을 보듯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드라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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